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의 여진 정벌 (문단 편집) == 제2차 여진 정벌(예종 시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5dR20emOt0)]}}} || 이렇게 평화가 이어지는 듯 했으나 불과 1년 후인 예종 2년(1107년) 국경 지역 여진족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전방의 소식을 들은 예종은 고민 끝에 1107년 12월,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 신하들이 여진 정벌을 망설이던 예종에게 불상 속에 담아두었던 숙종의 유언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한 후 17만명의 [[별무반]]을 갈라전(曷懶甸)으로 출정시키며 여진 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신이 성고(聖考)[* 임금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 여기선 숙종을 의미한다.]의 밀지를 받았고 이제 또 엄명을 받드니 감히 3군을 통솔하여 적의 진을 파하고 우리 강토를 넓혀 나라의 수치를 씻을 것이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윤관]]. 오연총의 걱정에 답하며}}} 고려의 단순히 길목만 막고 대치하자던 1차 정벌 때와는 달리, 2차 정벌 당시 1단계로 기만 전술을, 2단계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속전속결로 여진이 차지하고 있는 부락을 파괴, 성을 접수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전투를 진행한다. 속전속결로 한 이유는 2가지인데 하나는 '''완안부에서 원군이 오기 전에 모든 성을 점령하자'''라는 군사적 이유와 함께 '''장기전으로 가면 국력이 휘청거릴수 있다.'''는 행정적 이유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